리뷰) 기억의 발자취 따라: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감상-도서

기억의 발자취 따라

: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1998)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것은 꼭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기억들 때문이다. 책 한 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책을 읽은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2009)>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한 구석이 있어서, 마음 속 망각의 바다 맨 밑에서 잠들어 있더라도 자그마한 진동만 있으면 떠오르곤 한다. 버즈비의 문장은 지나가다 곁눈질로 본 글귀인데, 어쩌다 읽은 이 문구가 촉매가 되어 완전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옛 기억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런 기이한 체험이 가져다주는 황홀감을 놓치기 싫어, 나는 가만히 누워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 무엇이었던가 하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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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떠오른 책은 고골의 <외투(1842)>였다. 누군가 내게 지망생이 된 계기를 물으면, 항상 나오는 소설. 너무나 빠져드는 소설이었기 때문에 나도 인생을 살면서 그런 작품을 꼭 남기고 싶어서, 그래서, 작가를 꿈꾸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은, 그건 절반의 고백이었다. 내가 그 책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불우한 생애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구석자리만 약속받은 삶. 성실함을 입증받아 계단을 올라도, 능력에 부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삶. 냉장고가 받는 애정조차도 받지 못하는 삶. 평생에 한 번 누리게 된 작은 사치조차도 도둑맞는 삶….


 문장 하나하나가 예고된 내 미래 같았다. 책을 덮어도 그의 절규가 아른거렸다. 그 절규를 뇌리에서 지우고자 내 나름 그의 삶을 행복한 결말로 바꿔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떨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그 소설이 지금도 떠오르기 때문에, 당연히 내 최초의 책은 <외투>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더 이전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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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나는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됐는데, 횟가루 날아다니던 그 집 창고엔 책이 많이 쌓여있었다. 어린이 위인전 만화나 성경 말씀을 해석한 목사의 책, 트랙터 수리 교본이나 농업신문 등 일단 수는 많았다. 


 굳이 먼지 쌓인 책을 뒤지게 된 건 원래 그림책을 좋아하던 나의 습성 탓이기도 했지만, 텔레비전도 들여놓을 틈이 없어 학교 파하고 나서 집에서 갖고 놀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만화 잡지를 사다 주셨지만, 내용이 짧은 여러 편을 엮어놓은 것이었기에, 재미는 두어 시간 만에 끝나고, 정말로 할 것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다 찾은 책이 저것이었는데, 왜 저걸 집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보다는 컴퓨터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집이 시내와 먼 시골 구석이라, 동급생들 학교 파하고 가는 PC방(유리 벽에 싸이버 카페, 정보통신 따위의 단어를 적어놓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가는 것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 교회 갈 때 한 시간 정도만 가는 게 고작이라, 컴퓨터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건 당연했다. 

 

 지금 저 책은 이사를 하는 도중 잃어버린지라, 직접 책을 보며 내용을 적는 게 아니라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것이 기억난다. 할머니가 가슴으로 자판을 두들기는 삽화 따위가 많았기 때문에, 아마 지금 재판하라면 절대 못 할 그런 책이긴 하나, 나름 정보가 충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트 바이트 같은 컴퓨터 정보의 기본 단위, CPU의 XT, 86, 386, 486, 펜티엄 등의 발달 계보나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과 PC통신, 모뎀 사용법 등…. 뭔지는 잘 몰라도 재밌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전유성을 코메디언으로 일하다, 서울의 유명한 컴퓨터 강사로 전업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작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자,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글쎄, 사실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체험담은 보통 그 책을 계기로 변한 지금의 삶과 성취를 이야기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예를 들어, 전유성의 컴퓨터 책을 본 기억 때문인지, 지금의 나는 프로그래머로 사는 것 같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책을 통해 옛 기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기 때문에, 이런 추억 되짚기를 여가를 겸해서 한 번쯤은 해보라고 감히 권할 수는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