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3): 바오 닌, <전쟁의 슬픔(1991)> 감상-소설

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3): 
바오 닌, <전쟁의 슬픔(1991)>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햇볕이 모든 곳을 비추는 것처럼,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이 모든 나라를 적셔 장막을 허물었다. 그러한 변화가 제일 잘 느껴지는 건 역시 정보이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장막 너머를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햇볕도 땅 밑 동굴 속까지는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 정보의 영역에서도 빛이 들지 않는 곳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은 전부터 수도 없이 나온 헐리우드 영화에서 다뤄지고, 한국에서도 참전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던 전쟁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었다. 기자들의 월남전 취재록이나 인터뷰가 고작이었다. 그런 추세였지만, 언제부턴가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이나 킴 투이의 <루(2009)>, <만(2013)> 등의 소설이 국내에도 소개되고 있다. 이젠 국내에서도 그들의 표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사건을 대할 때,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삶을 조명한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이나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담은 최인훈의 <광장(1960)>같은 작품을 보자.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감정 등이 얽혀 하나의 형식으로 형상화됐다. 그렇게 형식으로써 열려진 생각이 됐기에, 인간이 독자로서 그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그 자체로 소통의 창구가 된다. 그런 맥락 속에서 예술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 시대의 창이 된다.

 <전쟁의 슬픔>도 그런 시대의 창 중 하나이다. 검열의 오물을 시대의 눈물로 씻어내고, 온전한 모습으로 독자에게 온 소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월남인의 시선으로 본 월남
 

 소설은 주인공 끼엔이 전쟁이 끝나고, 유해발굴에 참여하면서 옛 기억을 반추하다 잃었던 사랑 프엉을 찾는 것으로 진행된다. 참전 경험이 있는 작가의 전쟁 소설이 으레 그렇듯, 이 소설 또한 전쟁의 더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샘플

 전투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그해 건기에 햇볕은 타는 듯이 뜨거웠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휘발유에 흠뻑 젖은 숲은 지옥 불에 휘감겼다. 괴멸당한 중대들을 재편성하면 이내 또 괴멸당했다. 네이팜탄에 맞아 참호를 뛰쳐나온 이들은 병사건 지휘관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성을 잃고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우르르 뛰어들거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차레로 쓰러져 갔다. 머리 위로는 나무 꼭대기 바로 위까지 내려온 헬리콥터들이 중기관총의 총구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덜미를 겨냥해 쏘아 대는 듯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콸콸 쏟아져 땅을 흥건히 적셨다. 덤불숲 사이에 있는 마름모꼴의 이 불모지에는 나무와 풀이 지금까지도 넋이 돌아오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한다고 한다. 갈가리 찢기고 부서지고 깨진 나뭇조각들만이 어지러이 널린 채 헐떡거리며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행인이나 자전거를 증오하는 버릇이 생겼어. 탱크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어. 그들 속으로 돌진하지 않으려면 엄청나게 자제심을 발휘해야 했지. 자네들도 사람을 깔아뭉개는 광경을 본 적이 있지? 그렇게 무거운 탱크도 말이야, 시체 더미 속의 뼈들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곤 했지. 탱크 안에 앉아서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그 약간의 흔들림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어. 지금 땅이나 나뭇조각이나 벽돌 더미 위가 아니라 사람의 몸 위로 지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어. 마치 물주머니 같은 사람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면서 터뜨리는 느낌이지. 아이고 세상에."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낙엽처럼 바스라지는 인민군 병사들, 홍마초와 카드놀이 말고는 낙이 없는 전우들, 민간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아무리 교육을 해도 강간을 저지르는 첩보대, 전쟁의 끝이 다가오자 한 몫 챙기고 싶어 약탈하는 군인들, 전쟁이 끝나자 네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내던져진 젊은이들, 호탕하게 웃던 사나이가 전쟁의 상처로 술과 폭력에 절어 망가지는 모습 등. 

 그런 광경이 담담한 문장으로, 세밀하게. 높은 밀도의 문장으로 적혔다. 그래야만 전쟁의 슬픔을 담을 수 있다는 것처럼.

 공산권 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사회주의 레알리슴에 충실한 모습이나, 혁명과 독립의 기쁨과 영웅서사를 노래하는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가 대상을 비추는 것처럼 그저 보여줄 뿐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에디 애덤스, AP통신 이미지, 월남전 당시 사이공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 날짜 미상.



내면의 순수


 전 글에서 전쟁 문학에서 프엉 같은 주인공의 연인은 전쟁 같은 큰 비극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어, 그 애틋함을 더하는 장치라고 설명했는데, 이 소설에도 프엉이 그렇게 사용된 건 같으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에서 싱클레어를 성장하는 주인공 자신으로, 데미안을 싱클레어 내면의 순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의 이야기는 결국 싱클레어가 삶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들이 주는 혼란 등의 감정을 내면의 목소리(데미안)와 대화를 나누며 소화하는 것이고, 이윽고 나중에는 자신의 순수는 죽어 사라진다. 다만, 그 흔적은 자신의 뇌리에 남아 살아있다. 소설 데미안이 말하는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이 소설의 프엉도 그런 존재이다. 전쟁이 나기 전, 젊은 날의 끼엔과 프엉은 성격에서부터 비슷하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후의 끼엔과 프엉의 모습은 확연히 차이 난다. 끼엔은 전쟁을 통해 변했다. 염세적이고, 말보다 주먹 솜씨가 더 좋고, 참지 못하고 화부터 낸다. 그러나 프엉은 변하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전쟁이 자신을 망가뜨려 놓았어도, 내면의 순수는 더럽힐 수 없었다.
 
 전우의 이야기와 전장의 참상을 쓸 때는 잘 쓰다가도 유독 프엉의 이야기를 써야 할 부분에선 쓰지 못하고 절망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끼엔의 글쓰기 행위도 결국은 자신의 순수인 프엉을 형체 없는 기억 속에서 완전한 형태로 불러오려는 행위이다. 

 그런데 왜 끼엔은 프엉을 불러올 수 없을까? 이는 소설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사실, 프엉은 전쟁 중에 강간당했다. 전쟁터로 가야하는 압력이 있었다지만, 어쨌건 자신은 순수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젊은 날. 아니, 지금도 남은 순수이기는 하나, 전쟁에 의해 더럽혀졌다.-범인이 미군이 아닌 베트남 국민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러니 끼엔의 슬픔은 글을 못 쓰고, 전우를 지켜주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런 탓에 자신은 끊임없이 프엉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이게 전쟁 이전의, 젊은 날의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인지, 어쨌든 살아남은 순수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끼엔과 프엉의 이야기가 제목처럼 슬픔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프엉은 깨끗하다. 더럽혀지지 않았다. 끼엔은 그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걸 다시금 확인하면서, 끼엔은, 프엉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나'는 벙어리 여자의 옥탑방에 보관된 끼엔의 원고를 손에 넣게 된다.

 이런 면모가 이 소설을 단순한 전쟁 소설로 남지 않게 해준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모든 전쟁을 관통하는 한 마디


 소설의 문장은 굉장히 촘촘하고 길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다. 어쨌거나, 전쟁으로 인해 떠나간 이들에게나, 전쟁 이후에 남은 이들에게나, 전쟁은 슬픈 것이다. 

 그 슬픔은 독립으로 인한 국가적 기쁨과는 별개이다. 대가는 국가만 치른 것이 아니다. 개개인 모두가 치른 것이다. 

 그래도 살아나갈 희망은 있다.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우리 안의 순수를 찾아야 하니까.

 그것이 전쟁의 슬픔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