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과 작가의 분리, 어떻게 해야 하나? 감상-소설


전 <레디메이드 인생(1934)>을 참 좋아합니다. 문장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 주인공의 구질구질함을 잘 써두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80년이 지난 오늘에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왜냐하면 좋아한다고 밝히자마자 친일파 소설을 왜 좋아하느냐고 핀잔을 들었거든.


그렇게 절망하다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평론 이야기를 하다가 교수님께서 서정주의 시를 한 수 읊으시면서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자화상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를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언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이 시를 두고, 저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라는 구절을 두고 서정주는 친일행위에 대한 반성을 안 하는 사람으로 두는데 참 잘못된 것이다.


그 사람이 매국행위에 반성을 했나 여부를 떠나서, 저 시로 그의 반성을 논한 것은 참 바보같은 짓이다.


왜냐하면 저 시는 친일하기 이전에 쓴 시거든.


그리고 분명 문학적 업적이 있는 사람을 두고 기념관 철거하라 뭐다 하는데


그게 매국행위를 기리기 위해서인가? 천만에. 그 양반의 문학적 업적이 있으니까 놓고 그런 거지.


작가와 작품을 무조건 연관지어서 설명하려고 하다 보니, 거기에 함몰돼서 그런 바보 같은 짓도 하는 거다. 알아보지도 않고.


너희는 작품과 작가를 분리해서 볼 줄 알아야 한다. 칼럼이니 뭐니 쓸 때 그게 편리하긴 하겠지마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구조주의적 입장에서 보라고 항상 강조하셨는데, 이거 솔직히 능력에 부쳐서 안 되겠다. 학술적인 게 아니라 그저 재미난 것만 찾아 읽었는데 이게 될리가.


그런데. 작가의 기억이 많이 반영될 수 밖에 없는 것이 문학, 아니 모든 예술이 그렇잖은가? 어떻게 완전히 떼놓는단 말인가.


그래도 이것저것 읽어가다 보니, 분명 선은 있는 것 같았다.


작가의 생애와 연관짓다 보면, 분명 작품은 고정된 색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작품의 배경을 알면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큐브릭의 영화로 유명한 <시계태엽 오렌지(1962)>.


인간의 폭력성은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가? 아니, 통제하는 것이 마땅한가? 정당한 폭력은 과연 있는 것인가?


폭력에 관한 화두를 수 없이 남기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내가 미군 병사들에게 구타를 당해 유산한 기억에 의거해 썼다고 밝혔다.


이 비화를 알게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주제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폭력범들은 전부 태생적인 범죄자들이며, 이 본성은 절대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철저히 통제받고 벌해져야 한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분리해서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이긴 하다.


자기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해설에 작가 생애를 끌어들이지 말 것. 어디까지나 작품의 이해를 좀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한 선에서 끝낼 것.


이런 것만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