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 책에는 책! 감상-소설

눈에는 눈, 책에는 책!
: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노인의 전쟁> 시리즈까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YES24.


 웹서핑을 하다 발견한 책인데, 제목만 보고 <반일 종족주의(2019)>를 반박하는 책인 줄 알았더니, 웬걸. 이영훈 박사 본인이 쓴 <반일 종족주의>의 후속작이었다.
 
 사실, 책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건 예전 전여옥 씨가 문제작 <일본은 없다(1994)>를 출간하자, 반박으로 <일본은 있다(1995)>가 등장했던 것처럼, 작가들이 서로 책으로 반박하는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에 책으로 응수하는 것이 직접 토론으로 맞붙는 것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방식이다. 서로 직접 언성을 높이거나 언짢은 표정 등으로 신경전을 벌여 보는 사람도 불편한 기분에 들게 만드는 토론보단야, 독자가 조용히 혼자서 직접 정리된 것을 읽고 판단할 수 있게끔 준비된 두 권을 진상 받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물론,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한 <일제 종족주의(2019)>도 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YES24



 게다가 책에 책으로 반격하는 건 그 자체로 유머러스하다. 저렇게 맞불을 놓을 때에는 비록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불문율이 존재한다. 


 1. 의제는 그대로 입장은 반대로.

 2. 비판하려는 책과 대구를 이루는 제목.
   
 3. 유사한 소제목, 목차 등의 형식.

 분량도 비슷하면 더욱 좋다.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패러디로 막을 올리는 셈이다. 단순 입씨름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다. 문학에선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1960>와 이영광의 <박근혜 만세(2016)>의 예도 그렇고 비교적 흔한 방식이다. 문학의 발전부터가 그랬다. 낭만주의를 반박하다 보니 리얼리즘이 나오고 리얼리즘을 반박하다 보니 모더니즘이 나오고, 모더니즘을 반박하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오는 식으로. 

 
밀리터리 SF 3종을 비교한 도표. 필자 편집.


 특히 SF 소설에서 이런 전통이 두드러지는데, 가장 좋아하는 사례를 고르자면 <스타십 트루퍼스(1959)>에서 <노인의 전쟁(2005)>까지의 사례이다. 기존의 기사 소설을 뒤틀어놓은 것으로 시작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돈 키호테(1605)>와 같이, 그러한 방법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소설들이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동력장갑복(Powered Armor) 개념을 대중화하는 등 현대 밀리터리 SF의 시조격인 작품인데,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전쟁에 나가, 강력한 갑옷을 입고 혼자서 수 백의 적을 압도하는 주인공이 전투와 전우들과의 교감, 그리고 선생의 가르침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모습은 한 명의 군인보다도 옛 기사문학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에 가깝다.

 거기다 나름 질서도 있고, 자유지상주의가 이상적으로 구현된 세계에 가까워서 군국주의 세계를 조명하는 작품 치고는 조금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영원한 전쟁(1974)>은 그런 낭만을 철저히 부수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궤도강하와 강화복의 성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전투로 화려하고 멋지게 막을 여는 <스타십 트루퍼스>와 다르게, 살인기술을 가르치는 교관과 땀내 나는 훈련소 막사를 비추며 시작한다.

 군 복무가 힘들어도 마치고 나면 약속된 만큼의 명예와 권리를 보상 받을 수 있는 <스타십 트루퍼스>에 반해, <영원한 전쟁>에선 소모품처럼 쓰이는 병사 목숨, 전쟁을 하면 할수록 피폐해지는 지구의 경제, 교관 자리를 약속해서 재입대했더니 최전방으로 다시 밀어넣는 졸렬한 군대…. 심지어 그 자랑스러운 동력장갑복조차도 맨몸뚱이의 외계인과 간신히 대등하게 만들어주는 성능이다. 흔히 입에 오르는 오웰 선생의 <1984(1948)>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의 예처럼, 요소 하나하나가 대칭점을 이룬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노인의 전쟁(2005)> 또한 <영원한 전쟁>을 뒤틀어, 청년에서 시작해 늙어가는 모습과 반대로 노인이 회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입는 강화복만을 보여주지 않고, 아예 강화된 인공육체에 정신을 이식하는 등 이것 또한 대칭점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전쟁을 보는 관점도 다른데,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는 전쟁도 권리를 획득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시련에 가깝게 묘사된다. <영원한 전쟁>에서의 전쟁은 지도계층이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을 공고히 다짐과 동시에 시민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전자는 개인에게 있어 선에 가까우며, 후자는 악에 가깝다. <노인의 전쟁>에서는 역사적으로 지구의 국가들이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 

 이렇게 명확히 대칭되는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주장을 수월하게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존재 자체로, 편향을 막아줄 기회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기존에 익숙한 개념을 비틀어 재창조하는 창작 방식은, 단순 다원성 추구에서 그치지 않고 쉽게 재미를 주는 방법이기 때문에 더욱 권장할 만하다.



문재인 만세

문재인 만세
―김수영을 기리는 이영광을 기림


'문재인 만세'
동네 평안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이것만 인정한다면
고통도 외로움도 없어지는데
그럴 순 없다고 면박이니
나는 자리를 뜰 밖에

'문재인 만세'
도내 평안의 출발은
이것을 봐주는 데 있는데
이것만 봐준다면
이것만 봐줬더라면
싸움도 견제도 없이 사는데
그럴 순 없다고 성을 내니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문재인 만세'
나라 평안의 출발은
이 한마디를 흘려듣는데 있는데
이 한마디만
이 한마디 말만
서로 갈등도 없이 살 텐데
미쳤느냐며 욕지기니 
나는 숨을 죽일 수밖에


04) 쏘가리(Looie) -1- 소설-전쟁터에 앉은 파리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역사상 최초로 개척된 우주식민지 아폴라 행성. 지구의 이주와 지원과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 맞물려, 새 기계처럼 잘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개척은 성황리에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전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다.
 전쟁이 시작된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촉매는 하나였다. 일명 똥고기 사건. 분변을 재활용해 만든 고기는 사료용으로만 쓰기로 법으로 정해졌던 바였으나, 통조림에 은근슬쩍 섞어 넣었던 것이 들키고 말았다. 그걸 아폴라 의원들이 뇌물을 받고 무마시키려 했으나, 너무나도 화가 난 아폴라 행성 사람들이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잘 굴러가던 우주식민지 하나가 분열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정함을 기치로, 서로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국가를 세웠다.
 물론, 당연하게도 아폴라 공화국은 신흥국들을 '진압'하려 움직였다. 성공하는 듯했으나, 그걸 보고 있던 지구의 수많은 기업이 군침 흘리면서 끼어드는 바람에 내전으로 변하고 말았다. 역사책엔 이 전쟁이 무슨 이름으로 적힐지는 몰라도, 똥고기 얘기가 들어가는 건 분명했다.


 20가구밖에 살지 않는 한적한 산골 마을에 천 명이 넘는 군인들이 들어찬 탓에, 마을은 도시만큼이나 시끄러웠다. 이장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불안함에, 녹슨 자물쇠까지 모두 꺼냈고, 심지어 못까지 박아대기도 하였다. 
 데멜군은 산적 떼나 다름없는 가난한 군대라고 하던 아폴라 공화국의 선전도 있지만, 혈기로 몸이 달아오른 건장한 이방인들이 총을 차고 우루루 몰려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공포를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눈을 부라리고 성큼성큼 걷는 모습에서 눈치채기 힘들지만, 간부들은 마을 사람들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간부들은 행여나 병사들이 사고 칠까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니는 건 같았지만, 병사들은 그 얼굴만큼이나 제각기 다른 형태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초병 근무 서는 인원이나, 노획 장비 정리 같은 잡무를 하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손이 비는 상태였다. 밀린 잠을 보충하는 인원, 전투식량을 까먹는 사람, 각기 다른 주제로 잡담하며 마음을 달래는 사람, 군장 점검해보는 사람,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는 사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애꿎은 흙을 괴롭히고만 있는 사람 등……. 
 어느 유형이 됐건 간에 간부들이 걱정하는 건 괜히 마을 사람과 접촉해서 사고를 치는 경우라, 물 길으러 나온 아주머니가 지나가거나, 전차나 소총 따위를 보고 호기심을 느낀 아이들이 기웃거리거나 할 땐 병사들보다도 간부들이 더 호들갑이었다.   
 손이 빈다고 주둔지에서처럼 막무가내로 무언가 시켰다간 공격도 하기 전에 피로로 탈진해 아무것도 못 하기 때문에, 놔두는 수밖엔 없었다.   
 "나 원 참, 무슨 유치원생 돌보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유치원생은 총이나 없지……."
 어쨌든 아직까진 사고도 없었고, 그럴 기미도 보이질 않았다. 군단장의 훈시처럼 쉬지 않고 진격해 적을 몰아치는 대전투 대신, 기나긴 기다림만이 있을 뿐이었다. 


 교회는 장교들로 가득했다. 예상보다 비좁고 험한 산길에 방비도 생각보다 잘 된 탓에, 회의실은 너구리굴(Chimney)이었다. 
 잔디밭에 난 잡초처럼 혼자만 머리가 긴 사복 기자는 여전히 눈길을 끌었다. 로머도 처음엔 이걸 걱정하는 편이었으나, 회의가 진행되면 금세 로머는 안중에도 없어졌기에 큰 탈 없이 진행됐다. 사진은 찍을 수 없어 구석에 박혀 눈알만 굴리는 신세지만, 적어도 방해는 안 된다는 점에서 만족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앉아 있을 때가 아닙니다." 6중대장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마이도(Mido) 주의 장악입니다. 교통 인프라가 우리 부대를 소화 못 하는 만큼, 신속하게 진격해 병목현상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소한 대대가 주둔할 만큼 넓은 서노아(Cernoa)까지는 가야 합니다. 거리도 여기서 직선상으로 사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으니 어려운 게 아닙니다."
 6중대장의 말을 메모하면서 로머는 되도록 표정을 바꾸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말씨 때문이었는데, 점잖게 정돈된 어조이긴 했으나, 강조하고 싶은 단어를 말할 때 튀어나오는 특이한 악센트는 감추고 싶은 우월감이 자꾸 고개를 불쑥 내미는 모양새였다. 그게 꼭 무슨 만화에 나오는 영국 귀족 같은 억양이어서, 이미 부대원들도 몰래 따라 할 정도였다. 그래서 로머는 일부러 험악한 전차중대장의 표정을 참고해가며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6중대장의 말에 5중대장도 한 마디 내었다.
 "게다가, 농사꾼이나 양치기가 고작인 이런 마을에 부대가 오래 머무르는 건 인심에도 좋지 않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군단장 각하께서 민사작전도 각별히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최대한 신속히 행동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지금 병사들도 피곤할 텐데, 여긴 숙영할 공간도 마땅찮고. 애매하게 멈출 바에야, 얼른 끝내고 쉬는 게 낫겠습니다."
 대대 정훈장교도 동의했다. 
 "으음."
 커다란 육지거북 같은 대대장의 얼굴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대대장의 이마에 주름이 깊어지는 것과는 반대로, 나머지 장교들은 슬슬 정리하고 움직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대장의 속내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저 '으음'은 어느 정도 결정을 내렸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안 됩니다."
 7중대장이었다. 6중대장의 눈썹은 눈이 감기는 것과 동시에 이마까지 솟았다.
 "우리 예상만큼 빠른 진격을 보장할 순 없는 상황입니다. 처음 공격을 기억하십니까? 전차가 일격에 파괴됐고, 반격하느라 작전이 지연됐습니다. 반격에 오래 걸린 이유는 비포장도로에, 주변은 나무가 빽빽해 기동할 공간도 없었고, 엄폐물도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일대의 도로는 대부분 그렇다는 점입니다. 분명 서노아까지 가기 전에 기습이 있을 겁니다. 기습에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기다리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으음."
 저울이 다시 기울었다. 어쩌면 대대장이 걱정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걱정도 없었다면, 굳이 이렇게 회의를 열진 않았을 테니까.
 "우리에겐 열한 대의 전차가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공격하면 기습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으음."
 망설임 없이 받아치는 6중대장의 말에 분위기는 다시 전투를 준비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전차중대장은 이제야 자기 차례가 왔다는 양 입을 열었다.
 "주행만 한다면 사 킬로미터 정도야 문제는 아니지만, 전투까지 고려하면 지금 쓸 수 있는 전차는 두 대뿐입니다."
 "벌써 고장이라도 난 건가?"
 6중대장은 전차중대장을 노려보았다. 전차중대장도 지지 않고 시선으로 맞받아쳤다.
 "회피기동을 하느라 기름을 다 써버렸습니다. 두 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것도, 나머지 전차의 기름을 조금씩 옮겨줬을 때의 얘기고요."
 "아."
 그 말에 6중대장은 고개를 떨구었다.
 "으음."
 이쯤 되자 로머는 대대장이 정말로 생각을 하는 게 맞긴 한 건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렇다면 우선 이렇게 합시다." 작전과장이었다. "먼저 전차 두 대와 보병소대 둘을 전진시킵니다. 그리고 삼십 분 뒤에 다시 보병 소대 둘을 보내고 선두에서 전투가 일어나지 않거나, 선두 부대에서 해결할 정도라면 바로 나머지를 움직여 남하하고, 선두에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엔 곧장 모두 이 마을로 후퇴합니다. 후속부대엔 박격포와 장갑차도 포함됐기 때문에, 뭔가 있어도 해결하고 다시 전진할 수 있을 겁니다."
 "으음."
 대대장 포함해서 모두 이의는 없었다. 전차중대장이 일어나자 대대장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충 결정된 분위기였다. 전차중대장이 나갔다고 나머지 장교들이 바로 엉덩이를 푸는 건 아니었다. 아직 결정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선두는 어느 중대가 맡습니까?" 6중대장이었다. "기습이 우려되는 만큼, 뛰어난 임기응변을 필요로 할 겁니다."
 '물론 그런 순발력을 갖춘 부대는 우리 중대고요.' 그런 후렴구가 들리는 듯했다. 목소리부터 의욕적인 것이, 아무래도 뭔가 만회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꼭 실수로 화분을 깨고 괜히 어머니를 도우려 하는 어린애처럼.
 정훈과장은 6중대장을 똑바로 보았다.
 "지금 육 중대는 소대장은 하나가." 정훈과장은 말을 고르는 듯, 한 박자 멈췄다. 마치 어떤 단어를 피하려는 것처럼. "공석이고, 또한 병사도 몇 명, 비는 상태다. 다시 공격에 투입하기엔, 좋은 상태가 아니야."
 6중대장의 고개가 기울어지는 것과 동시에 7중대장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오 중대는 개천에서 작업도 한데다, 보초도 서서 피곤할 거야. 그러니 제외하고. 공격은 칠 중대로. 나머지는 있다가 다시 정리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7중대장은 나가며 6중대장을 흘끗 보았을 때, 둘의 눈빛은 교차했다. 로머는 그 눈에 무슨 의미가 담겼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었던 건 확실했다.
 
 
 이번 공격엔 훈시는 없었다. 로머의 기념사진 촬영이 곧 조촐한 출정식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대원들은 옷매무새를 급하게 다듬는 건 기본이고, 힘주어 소총을 쥐고, 심지어 전차 포신을 말처럼 타기도 했다. 평소엔 어떨지는 몰라도, 사진기 앞에서는 모두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마치 소풍을 나온 학생들처럼. 
 로머의 눈에 그들의 군복에서 교복이 비쳐 보이곤 했다. 이 나라의 제도를 알게 된 뒤부터는. 사실, 자세히는 몰라도 오기 전까진 대부분 학생이었을 터다. 데멜의 징병제는 빈민개병제 소리를 듣고 있을 정도로 괴상한 형태다. 18세부터 33세의 시민을 징집하는 점은 지구의 징병제와 비교해도 크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나라의 경제를 지키며 전쟁을 한다는 명분으로 무직자를 대상으로 했다. 3개월 이상 직업이 없는 상태라면 장애가 없는 한 병사가 된다. 고졸 이하면 병사, 학사 학력이면 소위, 석사 학력은 중위 계급을 주는 식으로. 그렇게 인생을 채 배우지도 못한 이들이 무기를 쥐고 전선으로 간다. 전쟁이 2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이 제도는 도무지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도로 겁을 주어 근로자를 혹독하게 부려먹는 악덕 고용주의 얘기도 지금은 기삿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전쟁이 과열화된 지금은 적어도 허망하게 산화하지는 않으니 탄광일도 괜찮다며 독려하는 광부의 인터뷰 기사가 나오는 상황이다. 
 부대가 떠나고 사진을 확인하고 있자니, 어쩐지 뜻 모를 감정이 가슴에서 끓었다. 그렇지만 너무 감상에 젖어 할 일도 못해선 안 되었다. 스스로를 다 잡아야 했다. 로머는 자신의 일을 위해 걸었다.


03)프롤로그 -2- 소설-전쟁터에 앉은 파리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로머는 사진기를 쥐고 곧장 달려갔다.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담배 피우며 쉬던 군인들도 곧장 일어났고, 장교들은 움직이는 대신 무전을 기다렸다. 달리는 로머의 귀에 스며드는 건 무전 소리와 대화뿐만이 아니었다. 폭음과 총성도 멈추지 않고 들렸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더 치열한 모양이었다. 북쪽 방향으로 난 길은 하나였기 때문에, 합류는 어렵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마을 초입의 산길.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길 말고도 북동쪽 동굴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진입각이 높은 경사로였다.
 둘은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고, 셋은 경사면에 그대로 나동그라져 있었다. 몸뚱이 밑의 흙은 피를 함뿍 머금어 축축했다.  
 경사면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기대어 대기하는 부대원들. 익숙한 얼굴들이다. 6중대 2소대 사람들. 후위를 맡기로 해서 마음을 놓았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황을 보니 들어가고 싶긴 한데, 들어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경사면은 대강 보아 폭은 사람 스무 명 정도. 경사로 옆은 암벽. 우회로는 없었다. 경사면 한가운데를 따라 늘어진 시신들로 보아, 올라서자마자 당하는 구조인 것 같았다. 시신 중 한 구의 견장이 눈에 띄어 보니, 소대장이었다. 대니얼 포먼. 항상 솔선수범하는 사람이었다. 대원들을 대기시키고 먼저 올라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투입 명령을 받고 온 3소대장은 분대장을 붙잡고 물었다. 
 "상황은?"
 "둔덕 너머에 기관총이 있습니다. 머리만 내밀어도 맞는 구조입니다."
 2소대 2분대장 윈스턴 라이트 하사. 그렇게 말은 하지만, 정작 자기도 경사로 맨 위 끄트머리에, 아슬아슬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류탄도 이미 세 발 던져뒀습니다. 그래도 멀쩡히 쏘는 걸 봐선, 저 앞에 벙커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그 말에 3소대장 찰스 홀든은 코웃음 쳤다.
 "벙커는 무슨. 우리가 받은 지도는 이틀 전 기준으로 만들어진 최신 자료다. 저긴 빈 동굴이야. 네 말은, 놈들이 이틀 만에 벙커를 지었단 말인가?"
 "정말입니다."
 "시끄러." 홀든은 소총을 고쳐 쥐었다. "우리가 처리하겠다. 1분대. 중화기는 빠지고. 돌격조는 분대장 포함 다섯 명. 나랑 함께 돌격한다. 2분대는 2소대랑 자리 바꿔서 우리 엄호하고. 신호는 내가 내린다."
 2소대는 전부 밑으로 내려가 사주경계를 하고, 그 자리를 3소대 인원들이 차지했다. 교대할 때 기류가 그리 좋진 않았는데, 3소대원들의 시선은 2소대를 명백히 깔보는 눈빛이었다. 
 2소대의 별명은 파리소대다. 구더기가 큰 것에 불과한 파리. 짬 주워 먹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파리. 그래서 호출부호도 파리(Mosca)였다.
 무시당하는 2소대의 모습에 로머도 기분이 언짢았다. 같이 다닌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식사도 이동도 2소대와 같이 하기로 돼 있으니, 사실상 한 식구나 다름없었다.
 로머는 볼멘소리를 하는 2소대원들을 두고, 홀든 쪽으로 갔다. 로머의 사진기를 본 홀든의 입매가 하늘로 솟았다. 
 "눈치 한 번 빠르구만."
 그 말대로 눈치껏 자리 잡은 3소대원들을 찍어주었다. 사진기를 누른 그 순간, 경사로 너머에서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주황빛 예광탄 무리가 새벽하늘을 수놓았다.
 빛줄기는 하나. 즉, 저 앞의 기관총은 한 정. 홀든은 상병 이상 되는 대원들을 불러 수류탄을 던지게 했다. 연달아 들리는 폭음. 경사면에 기댄 사람들은 그 진동에 놀라 움찔거렸다. 하마터면 로머도 발밑의 진동에 놀라 미끄러질 뻔했다. 
 폭음이 그치자마자 홀든은 연막탄을 던졌다.
 "아까 얘기한 그대로 간다. 내가 신호하면 바로 시작한다. 알겠나?"
 병사들은 소리를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머릿속의 생각은 같았다. 먹이를 노리는 자칼의 눈빛. 그런 만큼 행동에 빈틈은 없을 것이다.
 연막탄은 스스로 몸을 녹여 구름을 피워올렸다. 새벽빛으로 물들어 푸르스름한 연기는, 시간을 먹고 덩치를 불렸고, 어느새 둔덕 밑에서도 머리를 보일 정도가 되었다. 
 "모두 전진!"
 홀든의 고함에 군인들이 움직였다. 그 순간.
 총탄이 연막을 뚫고 나왔다. 고함을 들은 건 부대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보이지 않는 탓에 마구잡이로 쏘는 듯했지만, 둔덕 너머의 그 좁은 길은, 전부 기관총의 사정거리. 전부 살상구역이었다. 부대원들은 뒤늦게나마 방향을 바꾸려고 했지만.
 "어웁, 컥!"
 비명은 나오기도 전에, 폐에서 총탄과 함께 찢어발겨 졌다. 찢긴 피부는 장기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단 수 초 만에 둔덕 너머는 정리됐다. 그 공간에서 숨을 뱉는 건 미처 타지 못한 연막탄과 달궈진 기관총뿐.
 "어쿠!"
 총성에 놀란 홀든은 돌격하기도 전에 미끄러지고 말았다. 경사로를 구르며 떨어진 그를, 밑에 있던 소대원들이 부축해주었다. 휘청거리긴 해도 일어서는 걸 보아, 어디 부러지거나 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엄호를 맡은 나머지 대원들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죽은 대원들의 모습이, 감긴 눈꺼풀 안에서도 잔상처럼 재생되었다.
 "거기 다 내려와." 홀든이었다. "다시 2소대랑 자리 바꿔. 보고하고, 작전 다시 세운다."
 그러자 3소대원은 전부 기다렸다는 듯 모두 내려왔다. 2소대원들 몇몇이 궁시렁거리는 걸, 라이트 하사를 비롯한 선임병들이 달래느라 고생이었다.
 "기자 양반은 거기 남을 참이오?"
 "예, 아무래도."
 더 볼 일 없다는 듯 홀든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로머는 문득 사진기를 바라보았다. 사진기 안에는 대원들의 멋진 모습이 들어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용맹한 모습으로, 누군가는 긴장한 모습으로, 누군가는 걱정하는 모습으로. 그렇지만 이제 와서…….
 로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더 깊이 생각해봐야 변하는 건 없다.  
 "진짜 답이 없구만…." 
 라이트 하사였다. 어느새 로머의 옆에 2소대원들이 모여있었다
 "여긴 경사가 높아서 장갑차량은 못 올라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만 가봐야……."
 라이트는 카터 브룩스 상병과 논의 중이었다. 
 "맞아. 하지만, 빨리 해결봐야지. 여기서 부대가 묶여있다간, 작전 실패고 뭐고 우리부터 힘들어지게 돼."
 "당장 죽을걸요?" 브룩스의 말에 마빈 플로이드 상병이 껴들었다. "포먼도 이제 죽고 없잖아요. 본부 지시도 뻔해요. 다음 공격은 홀든 저 새끼 지시받고 우리가 돌격할 걸요? 그리고 그대로 뒈지고……."
 "입 조심해."
 브룩스의 꾸중에 플로이드의 째진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브룩스 상병. 나이가 33으로, 병 계급 중에선 제일 나이가 많았다. 게다가 아폴라안전보장공사(Apolla Safety Guarantee Corp.) 출신이어서 전술에 관해서도 밝았다. 그래서 2소대원들이 많이 의지하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도 지금은 난처하기만 했다.
 "벙커가 있는 건 확실해. 그런데, 거리부터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니……."
 "아까부터 그랬잖아요. 유탄부터 갈기자니까."
 "소용없어." 라이트가 답했다. "수류탄이 먹히지 않는다면, 유탄도 먹히지 않아."
 브룩스도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게다가, 거리가 안 맞으면 터지지도 않아."
 결국 제자리걸음이었다. 떠드는 소리에도 기관총은 병사들이 아직 돌입할 생각이 없다는 걸 아는 건지, 조용했다. 홀든도 구태여 말리지 않고 본부의 연락이 올 때까지 담배를 피워도 좋다고 허락을 내렸다. 
 긴장은 어느새 풀어졌다. 그것과는 별개로, 문제의 실타래는 아직도 엉켜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인간의 감이,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뇌리엔 갖가지 생각과 감정이 얽혀 아무것도 못 하지만, 분명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네 일이 아니야.' 
 로머에겐 여기에 나설 의무는 없다. 그래도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뇌리에서 다른 목소리가 속삭였다.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아."
 그런 방법이. 로머는 사진기를 둔덕에 걸치고 재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잡아끌었다. 섬광과 함께 기관총이 다시금 불을 뿜었다. 
 "뭐 하는 거야!"
 "아니, 잠시만요."
 브룩스의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머는 사진기를 살펴보았다. 로머가 한 박자 빨랐다. 사진기는 손상이 없었다. 그리고 액정에서 방금 찍은 사진을 골랐다. 다행히 번짐 없이 찍혔다.
 '역시.'
 둔덕 너머엔 벙커가 있었다. 곧장 브룩스 상병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벙커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라이트가 말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튼튼해 보이는데?" 
 콘크리트 벙커는 산 밑에 움푹 들어간 상태로, 제일 안쪽에 기관총구가 있고, 그 옆에 철문이 있는 형태였다. 쇠 덮개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총구. 콘크리트 벽은 가장 두꺼운 부분이 어림잡아 1m는 되는 듯했다. 
 브룩스는 턱 밑을 쓰다듬었다.
 "대충 거리를 보니 십오 미터는 넘어 보여. 좀 더 가까울 줄 알았는데." 
 플로이드가 자기 뒤의 병사를 가리켰다. 
 "그럼 이걸 쓰면 되겠네요."
 RPG-7. 휴대용 로켓포였다. 누군가 탄두에 상어 얼굴을 그려놓아 어울리지 않게 유쾌한 느낌이 들었다. 
 "전차도 잡는 놈이라고. 그럼 벙커도 뚫겠지."
 "글쎄." 브룩스는 치우라고 손짓하다, 이내 다시 손으로 로켓포를 쥔 대원을 불렀다.
"잠시만, 그거면 충분히 될 것 같아. 가방 좀 줘봐."
 로켓포 부사수가 탄두 가방을 내밀었다. 브룩스는 끝이 뭉툭한 탄두를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거 플로이드한테 넘겨." 브룩스가 말했다. "벙커 가운데. 같은 곳에 맞춰야 해. 실수하면 안 돼."
 "아직 탄 많구만 뭐." 플로이드는 능글거리는 얼굴이었다. "뭐, 그래도 오사마리(Run out, 収まり)는 제 전문잉게, 걱정 붙들어 매쇼잉."
 로켓포를 받아든 플로이드는 로머를 불렀다. 쏘기 전에 사진을 보면서 위치를 가늠할 요량이었다. 
 "뭘 어떻게 하려는 건가요?"
 로머가 브룩스를 보았다.
 "이 로켓포에 대해서 알고 있나?"
 로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영화에서 본 게 전부라서……."
 "그럼 설명하지. 이 뾰족한 탄두가 대전차 탄두."
 손가락 끝엔 상어 머리 모양 탄두가 있었다. 마름모꼴에 가까운 실루엣.
 "성형작약탄이라는 건데, 대충 깊은 구멍을 판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이건 열압력탄두."
 다음은 조립을 마친 탄두. 끝이 납작하고, 탄두 가운데는 뭉툭한 것이, 음료수 캔 같은 실루엣이었다. 
 "분말 상태의 연료를 사방으로 뿌린 다음 터지는 탄두. 예를 들어서 저런 벙커 같은, 밀폐된 공간을 제압하는 탄두라고 보면 돼. 모서리가 있어도 분말은 꺾이면서 퍼지지. 그, 연기처럼. T자 모양이면 T자 모양에 맞게, 그런 상태에서 터지면 모서리 끼고 숨거나 하는 것도 의미가 없지."
 브룩스는 이어서 대전차 탄두도 하나 더 조립했다.
 "하지만 그냥은 제압 못 해. 저렇게 꽉 막힌 벙커라면 분말 자체가 들어가지 않을 테니 의미가 없어. 그래서 구멍을 먼저 뚫을 필요가 있어."
 로머도 대충 알 것 같았다. 먼저 대전차 탄두로 구멍을 뚫는다. 뒤이어 발사된 열압력탄두는 분말을 벙커 내부 곳곳에 뿌린 뒤 폭발. 그러면 깔끔하게 제압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두꺼워 보이던데, 뚫을 수 있을까요?"
 걱정 없다는 듯, 브룩스는 웃어 보였다.
 "기관총이 있는 쪽은 다른 부분에 비해 훨씬 얇으니까. 사람이 서서 기관총을 거치해둬야 하니까, 아무래도 미터 단위로 채울 순 없지."
 과연.  
 몇 분가량 보더니 감을 잡은 플로이드는 바로 로켓포를 둔덕에 걸쳐두고, 머리는 둔덕 아래로 낮추었다. 그걸 본 브룩스는 수류탄을 쥐었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사격한다. 알았지?"
 소대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멋대로 진행해도 괜찮겠습니까? 홀든이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미안하네. 욕받이 좀 부탁하지."
 라이트의 물음에 브룩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라이트의 입에선 한숨만이 나왔다.
 "하……. 또 입니까? 알겠습니다." 
 이래서야 누가 분대장인지 모르겠다. 어찌 됐든 준비는 금방 끝났다. 플로이드가 좌우를 둘러보았다. 
 "다들 비켜."
 방아쇠를 당기자, 로켓포에서 폭음이 나는 동시에 둔덕 너머에서도 폭음이 들렸다.
큰 진동에 속이 울리는 것 같았다. 낚아채듯 내린 로켓포에 브룩스가 열압력탄두를 끼웠다. 그리고 다시 팔만 내밀고 발사.
 다시 폭음. 속이 울리는 것 같았다. 튀어나온 콘크리트 파편이 철모를 두드려댔다. 깡통과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무슨 단막극에서나 나올 법한 우스운 소리였다. 
 파편이 더 날아오지 않는 걸 확인한 브룩스는 곧장 수류탄을 던졌다. 다시 폭음과 진동.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어헙!"
 적의 비명과 신음이 들린다는 점이다. 브룩스는 재빨리 소총을 들고 일어섰다.  
 "이제 쏴! 고개 들어도 돼!"
 총탄의 비가 부서진 벙커로 쏟아져 들어갔다. 잘 보이진 않아도 소리로 알 수 있다. 적이 저항도 못 하고 쓰러져가는 것을. 로머도 사진 찍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오래 걸릴 것만 같았던 농성전은 2시간도 안 돼 막을 내렸다.


02)프롤로그 소설-전쟁터에 앉은 파리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눈앞의 광경을 어떻게 글로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 고작 기자 3년 차여서가 아니다. 누구라도, 이 모습을 보면 말을 잃을 것이다. 진상을 알면 더더욱.
 로머의 눈앞에선 십여 대의 전차들이 새벽안개 속에서 밀밭을 끼고 길을 따라 빙글빙글, 회전목마처럼 돌기만 하고 있었다. 땅은 시간이 지날수록 패여가고, 엔진소리는 새와 양의 울음을 먹어 치우고, 매연은 빵가마에서 나오는 구수한 냄새까지 덮어버렸다. 주민들은 잠도 못 자고 나와 그 광경을 불안한 듯,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밭의 주인인지, 심은 지 얼마 안 됐다며 안절부절못했다.
 부대원들도 어처구니없기는 매한가지였는지, 그 풍경을 두고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초안을 대강 적은 로머는 전화기를 들었다. 액정이 넓은 스마트폰이어서 빛이 많이 나기는 하지만, 등화관제 지시가 떨어지지 않아 담배 불빛이 반딧불이처럼 피어올라, 마을 곳곳을 차지하는 판이니 상관없을 터였다.
 "녹음 켜뒀다. 천천히 말해."
 편집기자 애덤 윌킨슨. 로머의 담당이자 맞선임이다. 
 느릿한 목소리. 짜증은 한 올도 섞이지 않은 그 말투에, 로머는 내심 감사를 느꼈다. 이미 얘기가 돼 있다지만, 새벽잠을 깨웠는데도 그런 말씨였으니…….
 로머는 눈앞에 보이는 전차떼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 자체는 글로 적자면 참 간단하지만, 전후 사정과 함께 적자니 참으로 난감한 것이었다.
 이 마을은 일명 뒷개울(Backwater)로 불리는 신망리(New hope village, 新望里)로, W5 전선의 시작이자 첫 목표인 지역이다. 
 해발고도 8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험준한 산악지역인데, 진입하려면 협곡으로 들어와야 할뿐더러, 도로는 포장도 안 된 데다 옆으로 빽빽한 숲까지 있어 좁았다. 그렇기에 부대의 모든 차량은 위험을 알면서도 한 줄로 줄지어 들어와야 했다. 게다가 공간 문제로 이렇게 큰 차량이 이동할 땐 길목이 꽉 막혀 앞 차량이 멈추면 뒤는 돌아갈 공간도 없어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이런 지형을 본 제4차량화보병사단장은 공병대부터 투입해 길목을 넓히며 나아가자고 제안했으나, 군단장의 지시로 3월 1일 어제부터 전진하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려대로 선두의 전차가 휴대용 로켓포를 맞고 불타버렸고, 길목은 막혔다. 두 개 소대는 도로 옆 숲으로 들어가 싸우면서 전진하고, 나머지는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직접 나무를 베고 폭약을 터뜨리고, 전차가 전차를 밀어 치우는 대공사를 진행했다. 그나마 사상자는 전차병 셋이 전부였지만, 낭비한 시간은 11시간. 
 그런 고생 끝에 마을까지 왔다. 그나마 마을에서의 전투는 적군이 공용화기가 기관총뿐인 부대 40명이 전부여서, 전차가 있는 4사단이 사상자 없이 끝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마을 남쪽에 있는 개울을 건너기 위해 전차가 움직였으나, 하필 개울의 길이와 각도가 참으로 절묘하게도 폭 3.5m, 깊이 2.5m에 진입각 60도. 그야말로 정석적인 대전차 도랑의 요건을 갖추었기에, 전차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개울에 푹 박혀버리고 말았다.
 마을 동쪽에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있긴 했지만, 통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라, 하중이 시원찮았다. 그래도 트럭까지는 건널 수가 있었기 때문에 트럭은 모두 건넜지만, 문제는 전차였다.
 아무리 봐도 30톤이 넘는 쇳덩이가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니었고, 그걸 굳이 시험해보려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병사들이 도랑을 파 전차가 건널 수 있는 각도로 만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 2대대 6중대장은 의견을 냈다. 다시 기습을 받는다면 전차가 1순위 목표가 될 게 분명하니, 대기하는 동안 전차는 계속 움직이게 하자는 이야기였다. 전차가 움직이면 조준을 하기 힘들어지니, 적이 쏘지 못한다는 논리였다. 대대장은 좋은 생각이라며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결과가 바로 저 광경이다. 회전전차(Tank-go-round). 
 그래서 제목도 '전차 퍼레이드: W5 전선에서의 첫 승리'로 붙였다. 윌킨슨은 풋 하고 웃었다. 
 "제목 너무한 거 아니냐."
 사실, 로머는 제목 짓는 감각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지구에 있을 적에도 제목 가지고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있는 거죠."
 "짜식……." 
 목소리 톤으로 보아 이제 끊을 참인 모양이었다. 윌킨슨은 통화를 끝내기 전, 전부터 으레 하던 충고를 덧붙였다.
 "너는 기자라는 걸 명심해라. 문제를 해결하는 건 네 일이 아니야.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거야. 목숨 보전과 보고가 최우선이다. 거기서 비겁한 놈 소리를 듣더라도 그래야 해. 그게 네 일이고 의무니까. 알겠지?"
 "염려 마세요."
 통화가 끝나자마자 곧장 사진기부터 들었다. 어느 언론사가 그렇듯이, 동데멜시보(The East Demel Times)도 취재기자에게 요구하는 건 사진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진이 곧 돈이니까. 
 아직도 전차는 돌고 있었다. 그런데 로머가 보기엔 움직인다고 안 맞을 것 같진 않았다. 2미터라는 간격이 있긴 했지만, 로켓포에겐 그리 긴 간격이 아닌 듯 보였다. 거기에 전차들이 한 군데만 계속 도는 데다, 열 대가 넘었기 때문에 원하는 부위는 아니어도, 전차 자체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다.
 어쨌건 그것은 군인의 일. 로머는 로머의 일을 해야 했다. 새벽안개 속에서 전조등을 켜고 빙빙 도는 전차의 모습은 나름 멋있지만, 신문에 실릴 걸 생각해야 한다. 윤곽이 보이긴 하지만, 어두워서 윤곽만 보이는 정도이기 때문에 그대로 찍는 건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다. 
 화각은 60도. 우선 3대 정도 잡히게 두고 셔터 세 번.
 세 번 번쩍임과 동시에, 누군가 흙을 차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머가 돌아보자, 흙 얼룩 한 점 없는, 깨끗한 군복을 입은 백인 사내가 있었다. 제럴드 랜달 중위. 6중대 정훈장교. 정훈과장이 오지 않고 그가 온 것은 로머가 6중대 2소대에 있기로 한 탓이리라. 
 "무슨 일이시죠?"
 뻔했다. 전차들을 찍지 말라는 것이지. 아무래도 상황이 그러하니, 숨기고 싶은 건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로머는 알면서도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물었다. 변명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하지만 랜달은 달랐다.
 "저기, 다른 걸 찍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더 좋은 사진이 나올 텐데."
 "아, 그렇습니까?"
 준비하던 변명을 도로 삼켰다. 그러고 보면 랜달은 비교적 융통성이 있는 편이어서, 대부분의 장교처럼 강압적으로 나오거나, 무조건 막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머가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다른 장교보다 의식하는 편이었다.  
 로머는 북쪽을 보았다. 전장 정리를 하는 군인들. 죽은 군인들 무기와 탄약을 추려내고, 군복을 뒤져 유품을 한군데에 모은다. 군복을 벗기는 대신 인식표를 떼어 수레에 하나하나 실었다. 수레가 향하는 곳은 마을 북쪽 어귀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마침 묘지가 있으니 여기다 묻으려는 거겠지.
 "거기 말고."
 정훈장교가 가리킨 쪽은 문제가 된 개울 남쪽이었는데, 야전삽을 쉴 새 없이 놀리는 옆에서 군인들이 개울에 들어가 경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참호 속에서 총을 겨누는 모양새가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멋졌다. 포신이 하늘로 꺾인 채 빠진 전차는 빼야 군에선 좋아할 것 같지만, 그것까지 넣어도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괜찮네요. 보는 눈이 있으시네."
 "별말씀을."
 로머가 순순히 따르자, 정훈장교도 군말 없이 물러났다. 하지만 눈은 로머에게서 떼질 않았다. 엉뚱한 걸 찍지 말라는 게지.
 전차도 전장정리도 구미가 당기는 소재였지만, 아무래도 그냥 찍기엔 눈치가 보이니 일단 따르기로 했다. 후딱 찍고 나서 미처 못 찍은 것도 마저 찍을 생각이다.
 대충 보니 개울 밖에서 찍어도 될 것 같았다. 아니, 개울 안에서도 몇 장 찍어야겠다. 그 왜 있잖은가. 월남전 당시 참호 속에 몸을 묻은 군인들의 사진. 좁고 정적이지만 현장감은 뛰어나다. 로머도 이번엔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각은 55도로 두고. 서서 세 번. 자세 낮추고 세 번. 
 '아뿔싸.'
 순간 번쩍이는 섬광에 놀란 군인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전부 로머를 보았다. 
 "그냥 사진 찍는 거에요. 사진, 사진. 죄송합니다."
 뒤늦게 쏟아지는 시선에 놀라 급히 사과했지만, 따가운 시선은 거두어지질 않았다. 잘 보니 몇 명은 총구까지 겨누고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향한 총구. 그 좁은 심연을 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머는 플래시 기능을 끄진 않았다. 
 아니, 실은 끄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기는 아폴라 행성에 오자마자 산 캐논 EOS 5D mark II. 성능은 좋았지만, 사용법을 몰랐다. 설명서가 있긴 했지만, 지금 읽기엔 너무 어둡기도 했고. 
 일단 당장 전투도 없으니, 지금은 이대로 찍고 날이 밝으면 천천히 볼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도도도독. 낡은 북을 치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관총 소리다. 방향은 북쪽. 소리를 대강 들으니 타고 왔던 산길 쪽이었다. 로머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 좀 전에도 경계하던 군인들이 졸다가 총을 잘못 만져 소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가봐야 의미가 없다. 그래서 다시 개울을 찍으려고 들어간 순간.
 도도도독. 따닥. 따닥. 따다닥. 소총 소리도 함께 들렸다. 
 전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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