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기억의 발자취 따라: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감상-도서

기억의 발자취 따라

: 컴퓨터,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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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들은 우리를 과거로 인도한다. 그것은 꼭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 때문만은 아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둘러싼 기억들 때문이다. 책 한 권을 기억한다는 것은 곧 그 책을 읽은 어린아이를 기억하는 것이다.”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2009)>


 사람의 기억이란 참 신기한 구석이 있어서, 마음 속 망각의 바다 맨 밑에서 잠들어 있더라도 자그마한 진동만 있으면 떠오르곤 한다. 버즈비의 문장은 지나가다 곁눈질로 본 글귀인데, 어쩌다 읽은 이 문구가 촉매가 되어 완전히 없어진 줄로만 알았던 옛 기억들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런 기이한 체험이 가져다주는 황홀감을 놓치기 싫어, 나는 가만히 누워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이 무엇이었던가 하고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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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떠오른 책은 고골의 <외투(1842)>였다. 누군가 내게 지망생이 된 계기를 물으면, 항상 나오는 소설. 너무나 빠져드는 소설이었기 때문에 나도 인생을 살면서 그런 작품을 꼭 남기고 싶어서, 그래서, 작가를 꿈꾸게 됐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실은, 그건 절반의 고백이었다. 내가 그 책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아카키 아카키예비치의 불우한 생애를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의 구석자리만 약속받은 삶. 성실함을 입증받아 계단을 올라도, 능력에 부쳐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삶. 냉장고가 받는 애정조차도 받지 못하는 삶. 평생에 한 번 누리게 된 작은 사치조차도 도둑맞는 삶….


 문장 하나하나가 예고된 내 미래 같았다. 책을 덮어도 그의 절규가 아른거렸다. 그 절규를 뇌리에서 지우고자 내 나름 그의 삶을 행복한 결말로 바꿔보기도 했지만, 그런다고 떨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그 소설이 지금도 떠오르기 때문에, 당연히 내 최초의 책은 <외투>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더 이전의 기억이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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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나는 우리 가정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한 시골 마을에 정착하게 됐는데, 횟가루 날아다니던 그 집 창고엔 책이 많이 쌓여있었다. 어린이 위인전 만화나 성경 말씀을 해석한 목사의 책, 트랙터 수리 교본이나 농업신문 등 일단 수는 많았다. 


 굳이 먼지 쌓인 책을 뒤지게 된 건 원래 그림책을 좋아하던 나의 습성 탓이기도 했지만, 텔레비전도 들여놓을 틈이 없어 학교 파하고 나서 집에서 갖고 놀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만화 잡지를 사다 주셨지만, 내용이 짧은 여러 편을 엮어놓은 것이었기에, 재미는 두어 시간 만에 끝나고, 정말로 할 것이 없어진 것이었다.  

 

 그러다 찾은 책이 저것이었는데, 왜 저걸 집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림보다는 컴퓨터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집이 시내와 먼 시골 구석이라, 동급생들 학교 파하고 가는 PC방(유리 벽에 싸이버 카페, 정보통신 따위의 단어를 적어놓는 게 유행이었던 것 같다.) 가는 것도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어머니 교회 갈 때 한 시간 정도만 가는 게 고작이라, 컴퓨터에 대한 호기심이 강했던 건 당연했다. 

 

 지금 저 책은 이사를 하는 도중 잃어버린지라, 직접 책을 보며 내용을 적는 게 아니라 자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것이 기억난다. 할머니가 가슴으로 자판을 두들기는 삽화 따위가 많았기 때문에, 아마 지금 재판하라면 절대 못 할 그런 책이긴 하나, 나름 정보가 충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트 바이트 같은 컴퓨터 정보의 기본 단위, CPU의 XT, 86, 386, 486, 펜티엄 등의 발달 계보나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과 PC통신, 모뎀 사용법 등…. 뭔지는 잘 몰라도 재밌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전유성을 코메디언으로 일하다, 서울의 유명한 컴퓨터 강사로 전업한 것으로 알고 살았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 작은 충격을 받기도 했다.


 자, 그렇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글쎄, 사실 모르겠다. 이런 종류의 체험담은 보통 그 책을 계기로 변한 지금의 삶과 성취를 이야기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예를 들어, 전유성의 컴퓨터 책을 본 기억 때문인지, 지금의 나는 프로그래머로 사는 것 같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로.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책을 통해 옛 기억을 반추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기 때문에, 이런 추억 되짚기를 여가를 겸해서 한 번쯤은 해보라고 감히 권할 수는 있겠다.




눈에는 눈, 책에는 책! 감상-소설

눈에는 눈, 책에는 책!
: <스타십 트루퍼스>에서 <노인의 전쟁> 시리즈까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YES24.


 웹서핑을 하다 발견한 책인데, 제목만 보고 <반일 종족주의(2019)>를 반박하는 책인 줄 알았더니, 웬걸. 이영훈 박사 본인이 쓴 <반일 종족주의>의 후속작이었다.
 
 사실, 책 제목을 보고 기대했던 건 예전 전여옥 씨가 문제작 <일본은 없다(1994)>를 출간하자, 반박으로 <일본은 있다(1995)>가 등장했던 것처럼, 작가들이 서로 책으로 반박하는 아름다운 전통(?)이었다. 개인적으로 책에 책으로 응수하는 것이 직접 토론으로 맞붙는 것보다도 세련되고 우아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좋아하는 방식이다. 서로 직접 언성을 높이거나 언짢은 표정 등으로 신경전을 벌여 보는 사람도 불편한 기분에 들게 만드는 토론보단야, 독자가 조용히 혼자서 직접 정리된 것을 읽고 판단할 수 있게끔 준비된 두 권을 진상 받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물론, <반일 종족주의>를 반박한 <일제 종족주의(2019)>도 있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YES24



 게다가 책에 책으로 반격하는 건 그 자체로 유머러스하다. 저렇게 맞불을 놓을 때에는 비록 공인된 것은 아니지만, 나름 불문율이 존재한다. 


 1. 의제는 그대로 입장은 반대로.

 2. 비판하려는 책과 대구를 이루는 제목.
   
 3. 유사한 소제목, 목차 등의 형식.

 분량도 비슷하면 더욱 좋다. 


 본격적인 싸움에 들어가기 전에 패러디로 막을 올리는 셈이다. 단순 입씨름에서는 볼 수 없는 재미다. 문학에선 김수영의 <김일성 만세(1960>와 이영광의 <박근혜 만세(2016)>의 예도 그렇고 비교적 흔한 방식이다. 문학의 발전부터가 그랬다. 낭만주의를 반박하다 보니 리얼리즘이 나오고 리얼리즘을 반박하다 보니 모더니즘이 나오고, 모더니즘을 반박하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이 나오는 식으로. 

 
밀리터리 SF 3종을 비교한 도표. 필자 편집.


 특히 SF 소설에서 이런 전통이 두드러지는데, 가장 좋아하는 사례를 고르자면 <스타십 트루퍼스(1959)>에서 <노인의 전쟁(2005)>까지의 사례이다. 기존의 기사 소설을 뒤틀어놓은 것으로 시작해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돈 키호테(1605)>와 같이, 그러한 방법으로 명작의 반열에 오른 소설들이다.

 <스타십 트루퍼스>는 동력장갑복(Powered Armor) 개념을 대중화하는 등 현대 밀리터리 SF의 시조격인 작품인데,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전쟁에 나가, 강력한 갑옷을 입고 혼자서 수 백의 적을 압도하는 주인공이 전투와 전우들과의 교감, 그리고 선생의 가르침으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모습은 한 명의 군인보다도 옛 기사문학에 나오는 멋진 주인공에 가깝다.

 거기다 나름 질서도 있고, 자유지상주의가 이상적으로 구현된 세계에 가까워서 군국주의 세계를 조명하는 작품 치고는 조금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데, <영원한 전쟁(1974)>은 그런 낭만을 철저히 부수는 작품이다. 주인공의 궤도강하와 강화복의 성능을 가감없이 보여주는 전투로 화려하고 멋지게 막을 여는 <스타십 트루퍼스>와 다르게, 살인기술을 가르치는 교관과 땀내 나는 훈련소 막사를 비추며 시작한다.

 군 복무가 힘들어도 마치고 나면 약속된 만큼의 명예와 권리를 보상 받을 수 있는 <스타십 트루퍼스>에 반해, <영원한 전쟁>에선 소모품처럼 쓰이는 병사 목숨, 전쟁을 하면 할수록 피폐해지는 지구의 경제, 교관 자리를 약속해서 재입대했더니 최전방으로 다시 밀어넣는 졸렬한 군대…. 심지어 그 자랑스러운 동력장갑복조차도 맨몸뚱이의 외계인과 간신히 대등하게 만들어주는 성능이다. 흔히 입에 오르는 오웰 선생의 <1984(1948)>와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의 예처럼, 요소 하나하나가 대칭점을 이룬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노인의 전쟁(2005)> 또한 <영원한 전쟁>을 뒤틀어, 청년에서 시작해 늙어가는 모습과 반대로 노인이 회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입는 강화복만을 보여주지 않고, 아예 강화된 인공육체에 정신을 이식하는 등 이것 또한 대칭점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전쟁을 보는 관점도 다른데,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는 전쟁도 권리를 획득하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필연적인 시련에 가깝게 묘사된다. <영원한 전쟁>에서의 전쟁은 지도계층이 자신들의 권위와 이익을 공고히 다짐과 동시에 시민들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좋은 명분에 불과하다. 전자는 개인에게 있어 선에 가까우며, 후자는 악에 가깝다. <노인의 전쟁>에서는 역사적으로 지구의 국가들이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게 당연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에 가깝다. 

 이렇게 명확히 대칭되는 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서로 다른 주장을 수월하게 비교할 수 있게 해준다. 존재 자체로, 편향을 막아줄 기회가 되어준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기존에 익숙한 개념을 비틀어 재창조하는 창작 방식은, 단순 다원성 추구에서 그치지 않고 쉽게 재미를 주는 방법이기 때문에 더욱 권장할 만하다.



문재인 만세

문재인 만세
―김수영을 기리는 이영광을 기림


'문재인 만세'
동네 평안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이것만 인정한다면
고통도 외로움도 없어지는데
그럴 순 없다고 면박이니
나는 자리를 뜰 밖에

'문재인 만세'
도내 평안의 출발은
이것을 봐주는 데 있는데
이것만 봐준다면
이것만 봐줬더라면
싸움도 견제도 없이 사는데
그럴 순 없다고 성을 내니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문재인 만세'
나라 평안의 출발은
이 한마디를 흘려듣는데 있는데
이 한마디만
이 한마디 말만
서로 갈등도 없이 살 텐데
미쳤느냐며 욕지기니 
나는 숨을 죽일 수밖에


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3): 바오 닌, <전쟁의 슬픔(1991)> 감상-소설

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3): 
바오 닌, <전쟁의 슬픔(1991)>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햇볕이 모든 곳을 비추는 것처럼, 세계화와 정보화의 물결이 모든 나라를 적셔 장막을 허물었다. 그러한 변화가 제일 잘 느껴지는 건 역시 정보이다. 우리는 이제 서로의 장막 너머를 볼 수 있게 됐다.
 
 물론, 햇볕도 땅 밑 동굴 속까지는 비추지 못하는 것처럼, 그 정보의 영역에서도 빛이 들지 않는 곳은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은 전부터 수도 없이 나온 헐리우드 영화에서 다뤄지고, 한국에서도 참전자들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던 전쟁이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었다. 기자들의 월남전 취재록이나 인터뷰가 고작이었다. 그런 추세였지만, 언제부턴가 바오 닌의 <전쟁의 슬픔>이나 킴 투이의 <루(2009)>, <만(2013)> 등의 소설이 국내에도 소개되고 있다. 이젠 국내에서도 그들의 표현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사건을 대할 때,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좋지만,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도 아는 것 또한 중요하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의 삶을 조명한 채만식의 <레디메이드 인생(1934)>이나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담은 최인훈의 <광장(1960)>같은 작품을 보자. 당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감정 등이 얽혀 하나의 형식으로 형상화됐다. 그렇게 형식으로써 열려진 생각이 됐기에, 인간이 독자로서 그 세계에 다가갈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그 자체로 소통의 창구가 된다. 그런 맥락 속에서 예술은 단순한 표현을 넘어 시대의 창이 된다.

 <전쟁의 슬픔>도 그런 시대의 창 중 하나이다. 검열의 오물을 시대의 눈물로 씻어내고, 온전한 모습으로 독자에게 온 소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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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인의 시선으로 본 월남
 

 소설은 주인공 끼엔이 전쟁이 끝나고, 유해발굴에 참여하면서 옛 기억을 반추하다 잃었던 사랑 프엉을 찾는 것으로 진행된다. 참전 경험이 있는 작가의 전쟁 소설이 으레 그렇듯, 이 소설 또한 전쟁의 더러운 면모를 보여준다. 


샘플

 전투는 끔찍하고 잔인하고 야만적이었다. 그해 건기에 햇볕은 타는 듯이 뜨거웠고 바람은 거세게 불었다. 휘발유에 흠뻑 젖은 숲은 지옥 불에 휘감겼다. 괴멸당한 중대들을 재편성하면 이내 또 괴멸당했다. 네이팜탄에 맞아 참호를 뛰쳐나온 이들은 병사건 지휘관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이성을 잃고 빗발치는 총탄 속으로 우르르 뛰어들거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들어 차레로 쓰러져 갔다. 머리 위로는 나무 꼭대기 바로 위까지 내려온 헬리콥터들이 중기관총의 총구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목덜미를 겨냥해 쏘아 대는 듯했다. 피가 사방으로 튀고 콸콸 쏟아져 땅을 흥건히 적셨다. 덤불숲 사이에 있는 마름모꼴의 이 불모지에는 나무와 풀이 지금까지도 넋이 돌아오지 않아 싹을 틔우지 못한다고 한다. 갈가리 찢기고 부서지고 깨진 나뭇조각들만이 어지러이 널린 채 헐떡거리며 뜨거운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행인이나 자전거를 증오하는 버릇이 생겼어. 탱크 앞을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어. 그들 속으로 돌진하지 않으려면 엄청나게 자제심을 발휘해야 했지. 자네들도 사람을 깔아뭉개는 광경을 본 적이 있지? 그렇게 무거운 탱크도 말이야, 시체 더미 속의 뼈들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곤 했지. 탱크 안에 앉아서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그 약간의 흔들림을 더욱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어. 지금 땅이나 나뭇조각이나 벽돌 더미 위가 아니라 사람의 몸 위로 지나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어. 마치 물주머니 같은 사람을 가볍게 밟고 지나가면서 터뜨리는 느낌이지. 아이고 세상에."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 낙엽처럼 바스라지는 인민군 병사들, 홍마초와 카드놀이 말고는 낙이 없는 전우들, 민간인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아무리 교육을 해도 강간을 저지르는 첩보대, 전쟁의 끝이 다가오자 한 몫 챙기고 싶어 약탈하는 군인들, 전쟁이 끝나자 네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세상에 내던져진 젊은이들, 호탕하게 웃던 사나이가 전쟁의 상처로 술과 폭력에 절어 망가지는 모습 등. 

 그런 광경이 담담한 문장으로, 세밀하게. 높은 밀도의 문장으로 적혔다. 그래야만 전쟁의 슬픔을 담을 수 있다는 것처럼.

 공산권 문학에서 흔히 보이는 사회주의 레알리슴에 충실한 모습이나, 혁명과 독립의 기쁨과 영웅서사를 노래하는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카메라가 대상을 비추는 것처럼 그저 보여줄 뿐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에디 애덤스, AP통신 이미지, 월남전 당시 사이공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 날짜 미상.



내면의 순수


 전 글에서 전쟁 문학에서 프엉 같은 주인공의 연인은 전쟁 같은 큰 비극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어, 그 애틋함을 더하는 장치라고 설명했는데, 이 소설에도 프엉이 그렇게 사용된 건 같으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에서 싱클레어를 성장하는 주인공 자신으로, 데미안을 싱클레어 내면의 순수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소설의 이야기는 결국 싱클레어가 삶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들이 주는 혼란 등의 감정을 내면의 목소리(데미안)와 대화를 나누며 소화하는 것이고, 이윽고 나중에는 자신의 순수는 죽어 사라진다. 다만, 그 흔적은 자신의 뇌리에 남아 살아있다. 소설 데미안이 말하는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이 소설의 프엉도 그런 존재이다. 전쟁이 나기 전, 젊은 날의 끼엔과 프엉은 성격에서부터 비슷하다. 그러나 전쟁을 겪은 후의 끼엔과 프엉의 모습은 확연히 차이 난다. 끼엔은 전쟁을 통해 변했다. 염세적이고, 말보다 주먹 솜씨가 더 좋고, 참지 못하고 화부터 낸다. 그러나 프엉은 변하지 않았다. 예전 모습 그대로이다. 전쟁이 자신을 망가뜨려 놓았어도, 내면의 순수는 더럽힐 수 없었다.
 
 전우의 이야기와 전장의 참상을 쓸 때는 잘 쓰다가도 유독 프엉의 이야기를 써야 할 부분에선 쓰지 못하고 절망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끼엔의 글쓰기 행위도 결국은 자신의 순수인 프엉을 형체 없는 기억 속에서 완전한 형태로 불러오려는 행위이다. 

 그런데 왜 끼엔은 프엉을 불러올 수 없을까? 이는 소설 후반부에서 밝혀진다. 사실, 프엉은 전쟁 중에 강간당했다. 전쟁터로 가야하는 압력이 있었다지만, 어쨌건 자신은 순수를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젊은 날. 아니, 지금도 남은 순수이기는 하나, 전쟁에 의해 더럽혀졌다.-범인이 미군이 아닌 베트남 국민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그러니 끼엔의 슬픔은 글을 못 쓰고, 전우를 지켜주지 못한 데서 오는 슬픔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그런 탓에 자신은 끊임없이 프엉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이게 전쟁 이전의, 젊은 날의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인지, 어쨌든 살아남은 순수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끼엔과 프엉의 이야기가 제목처럼 슬픔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프엉은 깨끗하다. 더럽혀지지 않았다. 끼엔은 그저,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걸 다시금 확인하면서, 끼엔은, 프엉을 찾아 먼 길을 떠난다. 그리고 '나'는 벙어리 여자의 옥탑방에 보관된 끼엔의 원고를 손에 넣게 된다.

 이런 면모가 이 소설을 단순한 전쟁 소설로 남지 않게 해준 것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모든 전쟁을 관통하는 한 마디


 소설의 문장은 굉장히 촘촘하고 길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건 하나다. 어쨌거나, 전쟁으로 인해 떠나간 이들에게나, 전쟁 이후에 남은 이들에게나, 전쟁은 슬픈 것이다. 

 그 슬픔은 독립으로 인한 국가적 기쁨과는 별개이다. 대가는 국가만 치른 것이 아니다. 개개인 모두가 치른 것이다. 

 그래도 살아나갈 희망은 있다.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우리 안의 순수를 찾아야 하니까.

 그것이 전쟁의 슬픔을 이겨낼 유일한 방법이니까.


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2): 황석영, <무기의 그늘(1985)> 감상-소설

전쟁을 해설하는 작가의 방법 (2):
황석영, <무기의 그늘(1985)>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청룡부대와 교대하는 맹호부대(1966. 7. 22.). 우리역사넷.
 
 터널 비전(Tunnel vision). 동굴을 볼 때, 주변은 보이지 않고 빛이 들어오는 끝자락만 보이는 것처럼, 시야가 매우 좁아져 바로 앞만 보이는 현상을 의미하는 말이다. 단순히 안구나 뇌의 이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스트레스 등의 심리적 요인으로 생기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전장의 군인들. 극한 긴장 상황에 놓여 생기는 스트레스로 인해 터널 비전을 겪는다. 옆의 상황은 보이지 않고, 자신의 적. 자신의 표적만 보인다.

 어떤 사안이나 역사 등을 이야기할 때 사람마다 이야기가 다른 것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의 감각과 생각을 지배하는 경험이, 시야를 좁게 만든다. 그리고 사건은 한 사람의 경험으로 전부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대부분의 사건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만으로도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고민 없이 지내도 괜찮다.

 모든 사건이 이렇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지만, 분명 예외도 있다. 자신이 겪은 것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때가 있다. 뭔가 말로 나오기도 하고, 나름 앞뒤가 맞게 설명할 수 있긴 한데, 딱 이렇다 하고 말하기는 참 곤란한 경험. 그러한 체험이 작가를 만드는 것 같다. 승화라는 게 결국은 그런 체험을 자신에게부터 이해시키려는 시도니까.

 그렇기에 작가들은 자신의 체험을 설명하기 위해,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경험만으로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사건의 맥락은, 그 사건의 규모를 따라간다. 사건이 크다면 당연히 한 사람이 볼 수 있는 것도 좁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체험이 그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위치에서 이루어졌다면? 

 황석영은 월남에 파병돼 전투병으로 복무하다, 청룡여단본부 CID(범죄수사대)에 복무하며 암시장을 감시했다. 그렇기에 그는 월남전의 전방과 후방. 그리고 감춰진 곳까지 전부 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기의 그늘>은 그런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소설이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무기의 그늘>만의 이야기


 전쟁을 다룬 창작물의 주인공은 보통 몇 가지로 한정된다.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군인이거나, 부대 지휘관이거나, 병사로 구르다 진급해 지휘관이 되는 등. 전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연하다. 이용자들이 전쟁 매체에서 찾는 건 전투니까. 이따금 자전적인 이야기여서 난민인 경우도 있지만, 결국 극한 상황 속에서의 갈등이 중심임은 마찬가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안영규는 여타 소설들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암시장을 감시하는 수사대원이다. 직별부터가 다른 만큼 기존의 전쟁 소설에서 보기 어려운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어째서 수사관들의 용돈벌이를 눈감아주는가? 수사관들이 암시장을 감시하려면 직접 암시장에 뛰어들어서 암거래를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작은 이익을 챙기는 것까지 간섭하면 자율성도 떨어질 뿐더러, 어차피 국가 입장에선 푼 돈이다. 

 어째서 전투식량(C-ration)만큼은 미군이 반출을 금지하는가? 갖고 다니기도 편하고, 보관도 용이하고, 흔적 감추기도 편한 미군의 전투식량을 북베트남군이 확보하면, 그만큼 북베트남군의 기습 공격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어째서 미군은 군표를 쓰는가? 파병지의 경제가 본국의 경제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분리하기 위함이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파병지의 경제를 손쉽게 통제하기 위함이다.

 어째서 사과가 중요한가? 월남에서 자라지 않는 사과는 미국에서 들어오는 값비싼 수입품이기에, 부자들만이 먹을 수 있는 특권의 상징이니까. 

 이런 식으로 다른 전쟁 소설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부분이 많이 다뤄진다. 그대신 전투 장면 자체는 적다.-이야기의 초점이 전투가 아니어서 그렇다. 황석영의 전투 표현 실력은 <탑(1970)>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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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극


 전쟁소설이 으레 그렇듯이, 인물의 스펙트럼도 다양한 편인데, 부패한 남베트남 장교 팜 꾸엔 소령. 월남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매춘부 미미. 유쾌한 월남인 수사대원 토이 등. 하나하나 개성이 강하고 매력적이다. 


샘플

 팜 꾸엔은 그런 때 보면 매우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는 월남 제2군사령부에서도 수완가로 통하는 장교였다. 팜 꾸엔은 싸이공에서 대학을 나왔고 나트랑의 육군간부학교를 나왔다. 그는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말할 줄 알았다. 그는 교육생 때부터 동기들 사이에 두각을 나타냈다. 그것은 실로 단순한 착안이었다. 미 고문인 육군 중령의 의견을 두둔하는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고문관이 우계에서의 판초 사용법과 말라리아를 예방할 때 바르는 모기약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것은 교과서였다. 한 우수한 후보생이 베트남의 우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바르는 모기약은 맞지 않는다. 월남의 우계는 중부에서는 9월부터 시작해서 3월까지다. 그러나 집중적으로 내리는 것은 아니고 하루에도 몇번씩 갠다. 모기약을 바르면 약은 곧 비에 씻겨가버린다. 비가 걷히면 풀숲과 나뭇잎 아래 숨었던 지독한 정글 모기가 덤벼든다. 따라서 미국에서의 모기약은 여기서는 쓸모가 없다. 대신에 말라리아 예방약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판초우비는 정글 매복전에 맞지 않는다. 판초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땅이나 숲에 떨어질 때와는 다르다. 그러니까 적에게 먼저 발견될 것이다. 그 대신에 얇은 비닐 조각의 망또가 나을 것이다.’ 이런 의견은 물론 해방전선이 사용하는 바를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고문관은 몹시 난처하게 되었다. 그는 전술을 가르치러 왔기 때문이다. 그의 전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미국은 미국식의 전쟁 개념으로 이들을 훈련시키고 끌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때 꾸엔 소령이 손을 들고 일어났다. ‘지금 그 반론은 베트남에서의 객관성이 결여된 견해다. 우리 전투는 주간 수색, 야간 매복이다. 야간에 이동하는 것은 적뿐이다. 우리는 개인화기에 있어서나 화력 지원에서나 세계 최고의 수준이다. 비옷에 대한 탁상공론으로 이러한 전력의 우세가 감소되지는 않는다. 적이 먼저 알면 포를 수십발 날려서 빠져나가기 전에 섬멸할 수 있다. 모기약도 마찬가지다. 비에 씻기면 또 바른다. 모기약은 얼마든지 만들어낸다.’ 그것은 아주 적절하고 자신있는 답변이라 예리하게 물었던 후보생의 질문은 오히려 패배주의적으로 들릴 정도였다. 고문관은 곧 이 우수한 장교를 주목했다. 그는 꾸엔을 연락장교로 임명했다. 꾸엔은 가장 미국적인 사고를 갖춘 장교로 지목되었고 그것은 미군이 원하는 바였다. 그는 빠르게 진급했고 곧 람 장군에게 추천되었다. 꾸엔은 장군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미리 알고 있었다.

 예시를 들자면, 팜 꾸엔의 경우 부패한 장교라는 전형적인 조연이지만, 매력은 주연 못지 않은데, 인맥으로 출세하는 부패한 장교상과는 달리, 훌륭한 처세술과 머리로 출세를 하는데, 이 과정과 착상, 그리고 전략 등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인물이 자기 이익을 챙기는 과정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관계, 미군이 만든 전략촌 계획의 허와 실, 군인들의 부정부패 과정 등이 조명된다. 수사대원 안영규 못지 않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인물들의 욕망이 작품의 큰 스케일에 비해 굉장히 수수하다는 점이 강조되는데, 주인공 안영규는 그저 무사히 집으로 살아돌아가고 싶어할 뿐이고, 부패한 장교 팜 꾸엔도 결국은 가족들이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랄 뿐이며, 미미도 그저 가게를 차려 먹고살기를 바랄 뿐이고, 한국군 병사도 그저 테레비나 냉장고 같은 걸 집에 하나 가져가고 싶을 뿐이다.

 비중 있는 인물 중에서 야망이 있는 건 베트민의 주인공 팜 민 정도인데, 그 야망은 북베트남이 승리해 외세에서 독립하는 것에 자신이 힘을 보태는 것이다. 그나마도 소꿉친구와의 사랑을 포기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잠입 공작보다도 자동소총의 감촉을 그리워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실 젊은 시절에 자연히 끓어오르게 되는 잠깐의 혈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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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표현


 이 소설은 기법이 굉장히 독특해서 다시 보게 되는 소설인데, 우선 타국인 간의 대화를 표현하는 방식이 참 독특하다. 안영규가 월남인 토이나 미국인들과 이야기할 때는 대화가 둘 다 문어체로 표현된다. 대화가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도록 초벌번역에서 느껴지는 어색한 느낌을 부여한 것이다. 따로 설명이 없어도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이 나기 때문에, 굉장히 좋아하는 기법이다.

 그리고 이 소설에선 이따금 장 사이에 안영규가 쓰는 것 외에도 미군의 수사 보고서가 나오는데,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1938)>에 등장하는 르포처럼 아무 예고도 없이 삽입된다.

 둘 다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볼 수 없는 전쟁의 이면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작성된 것이지만, 방법은 상당히 다르다. 오웰의 르포는 여과 없이 작가의 생각과 자료를 그대로 적은 것이라면, 황석영의 보고서는 형식은 달라도 보고서 그 자신이 소설의 일부라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누구의 방법이 옳은 지는 말하기 참 곤란하다. 하지만 나는 황 작가의 방법이 더 마음에 든다. 몰입을 깨뜨리지 않으니까.

 
샘플

 PX란 무엇인가. 큰 함석창고 안에 벌어진 디즈니랜드. 그리하여 지친 병사는 피 묻은 군표 몇장으로 대량 산업사회가 지어낸 소유의 꿈을 살 수가 있을 것이다. 오리도 토끼도 요정도 기계가 되어 뛰고 웃는다. 포장지와 상자에서는 느끼한 기름 냄새가 나고 그것은 꽃처럼 아름답다. PX란 무엇인가. CBU(집속탄) 폭탄 한개로 길이 일 마일, 너비 사분의 일 마일에 걸쳐서 백만개 이상의 쇠파편을 뿌릴 수 있고, 삼백 에이커를 단 사분 동안에 동물과 식물이 살지 못할 고엽(枯葉)지대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이 사용하는 일상용품을 파는 곳이다. PX란 무엇인가. 아메리카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라는 표어가 적힌 방패를 들고 로마식 단검을 들고서, 성조기의 옷을 입고 낯선 고장마다 나타나는 엉클 쌤의 지붕 밑 방이다. 원주민을 우스꽝스런 어릿광대로 바꾸고 환장하게 만들고 취하게 하며 모조리 내놓게 하고, 갈보와 목사와 무기 밀매업자가 사이좋게 드나들던 기병대 요새의 잡화점이다. 그리고 PX는 바나나와 한 줌의 쌀만 있으면 오순도순 살아가는 아시아의 더러운 슬로프헤드들에게 문명을 가르친다. 우윳빛 비누로 세수하는 법과,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코카콜라의 맛이며, 향수와 무지개색 과자와 드롭스와, 레이스 달린 잠옷과 고급 시계와 보석 반지를 포탄으로 곤죽이 되어버린 바라크 위에 쏟아낸다. 아시아인의 냄새 나는 식탁 위에 치즈가 올라가고 소녀들의 가랑이 속에서 빠져나간 콘돔이 아이들의 여린 손가락 위에서 춤춘다. 한번이라도 그 맛과 냄새와 감촉에 도취된 자는 결코 죽어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상품은 곧바로 생산자의 충복을 재생산해낸다. 아메리카의 재화에 손댄 자는 유에스 밀리터리의 낙인을 뇌리에 찍는다. 캔디와 초콜릿을 주워먹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은 저들의 온정과 낙천주의를 신뢰한다. 시장의 왕성한 구매력과 흥청거리는 도시 경기와 골목에서의 열광과 도취는 전쟁의 열도에 비례한다. PX는 나무로 만든 말〔馬〕이다. 또한 아메리카의 가장 강력한 신형무기이다.

 기지촌의 조용한 밤은 마치 폐광이 되어버린 서부 시절의 금광 마을처럼 적막하게 깊어간다. 울긋불긋한 간판과 조잡한 붉은 전구며 노랗게 물들인 매춘부의 머리카락 또는 손톱에 바른 빨강, 검정, 은회색, 갈색 따위의 매니큐어 같은 기지촌의 모든 색깔은 아메리카와의 연줄이 끊기자마자 일시에 퇴색하기 시작한다. 가짜 축제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초콜릿과 드롭스의 포장지나 매끈하고 꿈 같은 냄새가 나는 비누, 그리고 알파벳과 점잖은 무늬며 색깔과 금박 은박으로 장식된 담배 또는 술병들 따위의 모든 PX 물건들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이 사라지자마자 그 환상적 위력을 잃고 고립된 사물로 전락한다. 기지촌의 아침은 그래서 언제나 백주에 드러난 무대장치처럼 황폐하다. GI 머니가 바뀐다는 소문이 떠돌면 술집 주인, 세탁소 아저씨, 포주 엄마 그리고 창부들, 구두닦이들은 모두 미쳐버린다. 온통 달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GI들의 배신에 대하여 분개하고 마지막 날이 되면 드디어 세계에서 가장 위력있는 그림딱지를 의연하게 태워버린다. 불 속에서 그 기름진 종이는 순식간에 검게 변하고 오그라들면서 사라진다. 창부는 불을 들여다보면서 울지 않는다. 누구는 얼마 날리고 누구는 미리 알고 물건을 사두었다는 둥 누구는 군표로 침대 머리맡을 도배했다는 둥 하는 소문이 떠돌다가 다시 미군이 외출을 나온다. 모든 기지촌 사람들은 불 속으로 사라진 돈에 대해서는 금방 잊어버리고 여기에서의 생활과 사물들이 미군의 매개로 다시 생명을 되찾게 된 것에 안도한다. 미군의 주둔은 이런 마취된 안도감들과 굳게 연결되어 있다. 


 이것 말고도 읽는 도중 갑자기 말의 폭풍이 부는데, 갑작스러워서 몰입을 깰 것 같지만, 문장이 꽤 좋은 편이라 몰입하게 된다. 월남전. 아니, 미국이 개입돼 미국의 돈과 물자와 문화가 들어오는 전쟁은 전부 저런 모습이 아닐까? 저런 대목들을 한국 전쟁이나 이라크 전쟁 등에 빗대어봐도 꽤 들어맞는 구석이 많아 작가의 통찰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다. 어쩌면 미국의 전쟁 수행 방식이 항상 같았던 걸지도 모르지만….
 


보장된 재미


 그런데 이 소설이 자전적 소설임에도 지금도 읽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굉장히 재밌다. 작가의 체험을 담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소개하는 대신 스릴러 소설이라고 소개해도 될 정도로 재밌다. 심지어 추리소설처럼 독자가 직접 다음에 일어날 징후를 미리 짐작해보도록 구성된 파트도 있다. 주요 인물들 전부가 치열하게 두뇌싸움을 벌인다.

 예리한 의식과 막힘없는 전개, 적절한 호흡을 갖춘 문장과 매력적인 인간 군상. 이 소설에서 가장 특출난 매력이 무엇이냐고 콕 짚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전투에 가려진 전쟁의 참모습. 무기의 그늘을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이만한 소설이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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